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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Marionette Exhibition (2017.12.1~2017.12.31)

​Marionette

김경수 사진전

▷ 전시제목 : Marionette / 꼭두각시
전시기간 : 2017. 12. 1(금) ~ 12. 31(일) 
전시장소 : 사진갤러리 이데알레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신풍로 25 이데알레커피 / 070-8265-6572)

관람시간: AM 9:00 ~ PM 10:00

관람료 없음
별도의 오프닝 행사 없음 

너무도 인간적인 마리오네트를 위하여

 

 

김경수는 신작 <꼭두각시Marionette>에서 작고 여린 마리오네트를 모델로 내세워 현대인의 초상이자 작가의 자화상을 선보이고 있다. 마리오네트는 가느다란 실에 의해서 조종당하는 인형으로, 오직 누군가의 힘에 의해 움직일 수 있는 사물이다. 무대의 마리오네트는 머리와 팔다리에 매어놓은 실에 의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인다. 사람과 가장 닮은 인형의 형상이기에 마리오네트의 움직임은 모호함과 기이함을 안겨준다. 많은 예술가들이 마리오네트와 마네킹, 인형 등에 매료된 이유도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인간은 아닌 이들의 ‘인간적인 모습’에서 나오는 신비로운 친숙함 때문일 것이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종교적, 문화적, 제의적 기능뿐만 아니라 놀이의 영역에서도 인형은 살아있었다! 인형은 신과 예술과 인간 사이를 매개하며 때로는 인간을 조종하기도 하고, 대변하거나 위로하기도 하는 역할을 해왔다. 김경수가 신작 <마리오네트>에서 인형을 통해 사회와 삶의 가치를 드러내려 한 것도,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사물이 전하는 오래된 메시지를 담아내기 위함이다.

 

그간 인형을 소재로 작업을 하는 미술가 중, 에미 헤닝스(Emmy Hennings)와 소피 토이버(Sophie Taeuber), 한나 회의(Hannah Höch), 오스카 슐레머(Oskar Schlemmer)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이들은 주로 무대 연출과 함께 자신이 만든 마리오네트와 연기를 하기도 하고, 움직임을 더욱 정교하게 해서 인형을 통해 인간의 욕망과 정체성을 탐색했다. 생명이 없는 것의 인간적인 친숙함과 그들의 움직임이 주는 낯섦과 당혹스러움은 사회에 내제된 폭력이나 죽음을 형상화하며 사회적 금기와 인습에 위반을 시도한다. 김경수 또한 직접 연출한 무대에서 마리오네트의 연기를 감독하고 정교한 조명과 함께 사진을 찍음으로써 혼미와 멜랑콜리로 가득한 사진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사진 속의 마리오네트는 관객을 바라보기도 하고, 사진 속의 세계를 응시하기도 한다. 기괴하게 변형되어 불안과 공포를 자아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동정과 연민의 감정으로 마리오네트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우스꽝스럽고 괴기스러운 모습은 그로테스크하면서 생경한 세계를 만들어내는데, 익숙하고 편안하게 느끼던 것이 별안간 낯설고 섬뜩하게 다가오며 무대의 마리오네트가 현실 세계로 튀어나오는 듯 일순 시공이 뒤섞이기도 한다. 사진 속의(무대의) 마리오네트는 누구를,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그는 무엇을 욕망하고 무엇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가. 그리고 왜 작은 무대에 갇혀있을까. 관객의 응시에 의해 새로운 삶을 얻은 이 마리오네트들이 거주하는 무대는 기실 이 세계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도 조지 오웰의 빅 브라더처럼 우리 모두를 지배하고 있는 시스템의 작은 무대(세계)에서 서로의 응시를 끌어내고 있다. 마리오네트를 조종하는 인간인 작가는, 이미 자기의 분신이기도 한 이 인형을 통해 마리오네트가 관객을 바라보듯, 자신을 바라보고, 관객이 바라보는 것을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시각화한다. 작가는 능동적으로 마리오네트를 조종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와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마리오네트와 주고받는 응시 속에서 그를 자신의 일부로, 소유물로 만들기도 하지만 보이지 않는 응시에 갇힌 무대 위의 마리오네트가 바로 자신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김경수 사진의 교묘한 함정이 바로 이것이다. 빅 브라더의 감시와 통제, 욕망과 권력이 작고 여린 마리오네트의 사지를 묶어 무대 위에서만 움직이게 하듯, 우리 삶의 무대도 보이지 않는 역학구조 속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즉 지배적인 응시에 복속된 인간의 한계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인간적인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지만, 우리의(마리오네트의) 몸통을 연결한 ‘실’을 끊어버리면, 조명은 꺼질 것이고 무대 또한 사라질 것이기에 탈주의 가능성도 여전히 유효함을 시사하고 있다.

 

이 세계는 마리오네트가 연기하는 무대처럼 신비와 기이함과 이해의 영역을 벗어난 그로테스크함으로 가득하다. 이탈리아어 ‘그로타(grotta동굴)’에서 유래한 ‘그로테스크’ 미학은 자유로운 환상 속에서 현실 질서가 파괴된 세계를 제시하며 전통적인 미학과 도덕에 반해 새로운 인간주체를 회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로테스크는 낯설어진 혹은 소외된 세계의 표현이다. 즉, 새로운 관점에서 봄으로써 친숙한 세계가 갑작스럽게 낯설어진다. 그로테스크는 터무니없는 것과 벌이는 게임이다. 다시 말해서 그로테스크를 추구하는 예술가는 존재의 깊은 부조리들과 반쯤은 우스개로 반쯤은 겁에 질려 장난을 한다. 그로테스크는 세상의 악마적 요소를 통제해서 쫓아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필립 톰슨(Phillip Thomson)의 언급처럼 그로테스크의 세계는 공상적이고 환상적이지만 혼돈의 세계와 맞선 해학과 상상으로 가득한 우아한 세계이기도 하다. 보이지 않는 전쟁과 학살, 파괴와 폭력으로 난무한 21세기에 인간 소외와 상실감은 깊어가고 현대인들은 속도의 경쟁에 휩싸여 불안과 피로의 노예가 되었다. 생존 경쟁의 치열함 속에서 존재는 희미해지고 삶은 갈수록 각박해진다.

 

김경수는 각색되지 않은 자신의 생생한 경험담을 마리오네트를 통해 배우이자, 감독, 관객의 역할을 하며 펼쳐내고 있다. 김경수의 사진은 그 옛날 플라톤의 동굴을 연상케 한다. 동굴 벽에 비친 환영이 실제인 줄 알고, 그 안에서 지극한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과 부조리한 삶의 형태는 지독히도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동굴 밖에 실재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카루스의 욕망은 그것이 죽음에 이르는 위험한 길일지라도 언제나 날갯짓을 멈추지 않으며 그 존재를 증명하듯이, 김경수의 사진은 무대 밖의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 한다. 그의 카니발적 감각은 탈 권위와 무한 변신과 일탈을 꿈꾸는 모든 마리오네트들의 삶의 자리에 ‘라이트페인팅’을 시도하고 있다.

 

 

글 : 최연하(사진비평가, 전시기획자)

어둠 속에서 숨을 멈추고 마음으로 그려본다. 그러고 나면 오른손에 든 카메라의 리모트 스위치로 셔터를 누르고 왼손에 든 작은 조명으로 미리 만들어 놓은 무대에 빛 칠을 시작한다. 빛이 비치는 순간 드러나는 색상의 단편들로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이렇게 해서 젊은 시절 나의 열정과 아픔들이 한 장의 사진으로 만들어 졌다.

 

누구나 지난 삶을 뒤돌아보면 파란만장한 기억들을 떠 올리게 된다. 나 역시 평탄하지만은 않은 삶을 살았다. 과학자에서 기업가로 변신하고, 그동안 여러 번의 창업을 거치면서 숱한 성공과 실패를 반복해야만 했다. 죽도록 힘을 다해 어느 고지에 오르면 꼭 또 다른 장벽에 막히고 좌절할 틈도 없이 또 다시 새로운 고지에 올라야만 했다. 흥망성쇠의 사자성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삶이었다.

 

그때는 내가 내 삶을 결정짓는 주체라고 생각했기에 목표만 바라보며 최선을 다해 달렸다. 그리고 그때는 아무리 달려도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다람쥐 쳇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우리사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20대 중반부터 40대 중반까지 20여년은 가장 처절한 삶이 드러나는 시기이다. 20대 중반에 많은 꿈과 두려움을 가지고 사회에 첫발을 딛게 된다. 그리고 40대 중반이 되면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위치는 이미 결정되어진 시기가 된다. 그 사이에 우리는 무거운 책임을 지고, 숱은 유혹을 견디면서 힘든 목표를 위해 걸어가야만 한다.

 

그동안 나는 내가 주인공인줄 알고 살았는데, 그것이 결국 우리사회의 구조 속에 갇힌 꼭두각시였음을 알게 되었을 때 허무함을 금할 수 없었다. 그래도 어려운 고비를 무사히 건너온 꼭두각시이기에 후회는 없다.

 

이 작품은 사진가로 또 한 번의 변신을 한 후 진행 중인 작업으로 나를 바라보고, 나를 표현하기 위한 4연작 시리즈 중 두 번째 작품이다. 작품을 통해 그동안 내가 보고 듣고 느껴왔던 그런 감정과 색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무대를 구성하고 조명의 종류와 빛의 방향, 조도량을 조절하면서 다양한 라이트 페인팅(light painting)을 시도했다. 모든 작품은 카메라의 노출계에 의존하지 않고, 어두운 공간에서 오로지 감각에 의존하며 빨강과 파랑, 초록, 흰색의 빛을 섞어 30초 내지 2분 동안 그려내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해서 나의 꼭두각시가 만들어졌다. 작품 속의 꼭두각시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는 죽음의 색인 어둠만 존재한다. 프레임이 열리면 그 어둠에 한 줄기 빛이 쏟아지고 마침내 창조의 색들이 세상을 밝게 비춘다. 조명의 빛이 중매를 서서 맺어진 색이지만 그들도 함께 어울린다. 빛의 연주가 시작되는 것이다. 여기서의 연주는 칸딘스키가 말하는 작가의 눈으로 하는 연주가 아니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조명을 든 팔을 허공에 휘저어가며 만들어가는 그런 연주이다. 가슴에 울리는 마음의 소리를 프레임 속에 드러내는 연주이다.

꼭두각시는 내가 지난 시절과 소통하는 도구이다. 나의 대역인 꼭두각시가 지난 시절 거기에 있었고, 그런 감정을 가졌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기억이고, 이를 가슴에 그려 놓은 것은 추억이다. 그리고 이 추억의 그림자를 현실에 재현한 것이 나의 사진이다.

뭉크의 붉은 하늘, 고흐에 작품에 등장하는 노란색, 그리고 샤갈의 푸른색은 시공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 온다. 그래서 화가를 색의 또 다른 발견자라고 부른다. 조르주 쇠라는 빛의 과학을 자신의 화폭에 옮겨 놓았다. 점묘화법으로 색채학을 화폭에 실험한 것이다. 이렇게 그는 작품<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을 통해 신인상주의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정작 빛의 예술이라고 하는 사진에서는 작가의 의도대로 색을 사용하는 것이 쉽지 않다. 유일한 방법이 다양한 원색의 인공조명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다양한 인공조명을 서로 융합시키는 방법으로 라이트페인팅 기법이 있다. 작품 <꼭두각시>는 암실에서 빛의 3원색인 빨강과 초록, 파랑의 인공조명을 사용한 빛 칠을 통해 만들어 졌다.

정지된 시계는 그 때 바로 나의 죽음이다. 깨진 유리에 비친 나는 산산이 해체되어 소멸된다. 그 때 그 순간의 죽음이 어느 날 재현되었고, 지금 사진으로 남았다.

꼭두각시

팽팽한 줄에 이끌려 양손 번갈아 움직이고

어깨춤이 흥겨워지면

 

오늘도 꼭두각시놀음이다

 

너의 줄에 매달린 나는

춤사위도 이해 못 한 채

억지웃음 만발이다

 

너를 믿어도 될까

 

운명을 거스르는 바보처럼

손목의 줄을 끊으면

슬픈 반항이 시작된다

 

줄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면

금세 발목이 줄에 걸리고

내 의지는 차가운 바닥에 흩어진다

 

나를 믿어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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