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youngsoo Kim Photography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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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atar

아바타: 상상과 사유의 포지션

 

● 아바타, 또 다른 사유의 가능성

 

어린 시절에 누구나 한번 즘 아바타(Avatar)에 대해서 꿈을 꾼 적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런 이유는 나의 경우 게으름과도 관계가 있을 것 같다. 그 시절에 아침잠이 많은 나는 매일 아침 학교에 가기 위해서 일찍 일어 가는 것도 힘들었고, 숙제도 하기 싫었다. 이런 생각은 중, 고등학교 때로 이어지고 특히, 군대 생활의 경우 힘들고 괴로울 때는 나를 대신하는 누군가가 필요했었다. 정신분석에서 나를 대신하는 것을 적용한다면 더블(도플갱어, 분신) 정도가 해당할 것이다.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더블의 기능을 <모래 사나이>는 코펠리우스와 스팔란차니 교수를 분신이라는 개념으로 동일화한다. 분신의 또 다른 작용은 “올림피아와 나타나엘 자신의 억압된 잠재의식이 그 자신의 눈앞에 사람의 모습으로 분리되어 나타난 분신”이기도 하다. 이처럼 이중적인 의식은 자아에서 분신의 심리적인 작용으로 발생한다. 반면에 르네지라르(René Girard)의 미메시스적 폭력을 일으키는 더블은 좀 다르다. 이것은 폭력과도 연관된다. 작가가 아바타에 관심을 둔 이유에 대해서는 “내가 유독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좋아하는데, 게임 속에서는 현실 세계에서 엄두를 내지 못했던 용기도 낼 수 있고, 강적을 꺾고 굴복시킬 수도 있으며, 세계를 평정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 빠지는 속성은 게임이 지닌 특이점 때문이다. 특이점은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지만 익명성이 보장되며, 현실에서 실현 불가능한 욕망과 폭력을 해소하는 역할을 통해서 주이상스(jouissance)를 체감하기 때문이다. 게임은 인간의 폭력성을 높인다는 주장과 게임은 폭력 원인이 아니라는 사회적 논란이 계속되고, 게임이 폭력성을 높이는가에 관해 수많은 연구가 진행됐지만 연구 결과의 상반된 대립으로 학계에서도 뚜렷한 합의가 없는 실정이다. 프로이트는 게임이 공격성 해소에 도움이 된다는 뜻을 표명했다. 즉 폭력성이 인간의 본능이고, 쌓인 폭력성은 분출해 카타르시스(catharsis)를 느껴야 해소된다고 보았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계승한 현대의 카타르시스 이론도 공격성의 배출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며, 더 나아가 폭력적인 것을 간접 경험해도 공격성을 배출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폭력적 게임은 오히려 감정적 독소인 폭력성을 배출시키는 기능을 하는 셈이다. 작가의 사진에 등장하는 아바타는 이처럼 상상 속의 ‘또 다른 나’인 아바타로 투사(projection)되는데, 일차적인 작용인 물리적 폭력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평소에 타인에게 말하기 힘든 감정의 작용으로 작가와 아바타를 통해서 무언가 색다르고 흥미로운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구체적으로는 어두운 폐허 속 공간에서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의 미세한 작용, 문 앞에서 투명하게 빛나는 어떤 미지의 ‘여성 생명체/아바타’ 같은 것이다. 이것은 ‘분신/아바타’에게 어떤 신호, 소식을 알리는 판타지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이 상황은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에 불쑥 방문한 현상을 연출한 것으로 보이며, 창문에서 반짝거렸던 빛의 작용이 시각적으로 구체화 된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작가는 두 개의 공간에서 자신의 경험과 흔적(index)을 사진을 통해 창조적으로 표출함으로써 그 공간은 또 다른 사유의 가능성을 가지며, 이러한 공간 속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한다.

 

 

 

● 사진, 자성과 대타성의 변화

“사진속의 나의 아바타는 내가 가보지 못한 곳, 갈 수 없는 곳을 구분하지 않고 자유로이 여행할 수 있었다. 심지어 내 마음속 깊은 그 곳 까지도 아바타를 통해 접근할 수 있었다.”

- 김경수 작가의 작업노트 중에서

 

장 피에르 주네(Jean-Pierre Jeunet) 감독의 <아멜리에(Le Fabuleux destin d'Amelie Poulain>는 어른이 된 후에 아멜리에가 어렸을 때 느꼈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건강 때문에 여행 다니는 것을 삼가 했었던 사실을 안타까워했고, 아버지가 아끼는 빨간 색 고깔모자를 쓴 난쟁이 인형을 아버지 몰래 훔쳐서 자신의 친구인 스튜어디스에게 부탁한다. 부탁한 내용은 외국에 나가면 그 지역의 풍경을 인형과 함께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서 아멜리에의 아버지에게 계속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인형이 없어진 사실에 대해서도 궁금해 했지만, 인형이 어떻게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사진이 찍혀져서 자신에게 발송된 것에 더 궁금해 했다. 그것은 ‘모스크바’에서 ‘앙코르와트 사원’에 이르기까지 많은 나라를 다니며 찍은 사진들이었다. 이 사건은 그녀의 아버지에게 자극을 주어 홀로 짐을 꾸리고 여행을 떠나게 만든다. 아멜리에를 김경수 작가와 비교해보면 이렇다. 아멜리에는 ‘난쟁이 인형’이 아버지 대신 세계 여행을 하고, 그런 영향 때문에 아버지가 여행을 가게 됐다면, 작가의 경우는 자신의 ‘분신/아바타’을 통해서 여행한다. 작가에게 여행은 영화 ‘아멜리에’처럼 현실 세계를 여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분신/아바타’는 상상의 세계를 넘나든다. ‘분신/아바타’는 작가의 마음속에 담겨있는 세계를 표현하기도 하는데, 보이지 않는 마음의 세계를 시각화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예술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김경수 작가의 ‘존재’는 어느 곳에 위치하는가에 있다. 존재는 두 가지 방식으로 나누어진다. 나의 행동을 통한 현존과 현존을 통해 달라진 나의 존재가 있다. 존재의 구성 요소는 과거에서 있었던 경험을 근거로 구축되며, 그 과정에서 '자성(selfness: 나는 나)'과 '대타성(for otherness: 타인과의 관계)'이 발생하고 그 결과는 지금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기억이 안 나는데, 단지 기억이 안 난다고 해서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작가는 ‘분신/아바타’를 통해 상상의 세계를 구현한 것은 무의식에 감춰진 존재의 특성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작가가 방안에서 노트북을 열고 글을 쓸 때 ‘분신/아바타’가 옆에서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모습, 거울 속의 여성 아바타와 남성 아바타 사이에서 발생하는 상호작용성은 둘 사이의 ‘어떤 상황들’에 대한 이야기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듯하다. 이런 상황을 알리는 것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서 감정을 추스르고 재구성을 할 수 있는 ‘변곡점(point of inflection)’이 된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변곡점의 중심에는 김경수 작가의 ‘현존’ 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현존’은 무엇이라고 단정하기 힘들다. 그 이유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지금 김경수 작가의 ‘현존’은 과거의 ‘존재’와는 차이점이 분명히 있다. 그것은 현재 작가는 사진기라는 매개를 통해서 '자성(selfness)'과 '대타성(for otherness)'의 변화가 생기기 때문이다.

김경수는 사진을 통해 자기 내면을 성찰하고 명징하게 드러내는 특이한 자질이 돋보이는 작가다. 현실과 가상을 오가며 부단히 자신의 내면을 끌어안고 ‘분신/아바타’에 정신과 감정을 섬세하게 부여한다. 이처럼 그의 사진은 시간과 공간, 현실과 가상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환영의 힘이 있다. 작가는 오랜 시간동안 자신이 선택한 방법을 매개로 자신의 내부와 만나고 삶을 성찰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완성하고 그 세계로 관객을 불러서 소통과 교감을 시도한다는데 의미가 있다.

김석원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연구교수

아바타

 

 

어릴 적부터 꿈이 많았다. 손에 든 작은 군인 피규어 하나를 가지고도 가상의 공간에서 무수히 많은 적들을 물리치며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펴곤 했다. 장난감이 없이도 머릿속에서 새로운 군인과 전함을 만들어 시퍼런 바다를 누비며 적들과 싸울 수 있었다. 성인이 되어 사회에 진출해서도 힘든 일이 생길 때 마다 의자에 기대어 멍하니 앉아 있자면 순간 어떤 상상의 세계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우주전함의 모습이 떠오르고 일단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면 어느 듯 나는 우주전함을 타고 이름 모를 은하계를 비행하곤 한다. 예나 지금이나 마음속 한편에선 현실세계를 떠나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존재하는 것 같다.

 

아바타라는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감동과 전율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동안 내가 꿈꾸어왔던 모든 것이 아바타라는 단어 하나로 정리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릴 적 좋아했던 작은 피규어나 상상 속의 전함, 우주선 그리고 상상 속의 ‘또 다른 나’가 모두 나의 아바타였던 것이다. 아바타는 힌두교에서 지상 세계로 강림한 신의 육체적 형태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최근에는 사이버 공간에서 사용자의 역할을 대신하는 캐릭터를 의미한다. 내가 유독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좋아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게임 속에서는 현실세계에서 엄두도 내지 못했던 용기도 낼 수 있고, 강적을 꺾고 굴복시킬 수도 있으며, 세계를 평정할 수도 있는 것이다.

 

뒤늦게 사진기를 손에 들었을 때 사진은 나에게 새로운 상상의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사진기는 분명 렌즈 앞의 피사체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장치이지만 사진기를 통해 만들어진 사진이 항상 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진기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내가 꿈꾸는 상상의 세계를 구현할 수 있었다. 무대설치와 라이트 페인팅, 다중노출을 통해 만들어지는 사진은 그동안 내가 꿈꾸어왔던 상상의 세계를 현실에서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사진속의 나의 아바타는 내가 가보지 못한 곳, 갈 수 없는 곳을 구분하지 않고 자유로이 여행할 수 있었다. 심지어 내 마음속 깊은 그 곳 까지도 아바타를 통해 접근할 수 있었다. 내가 만든 ‘또 다른 나’는 사진기라는 차원이동 장치를 타고 다른 세상으로 자유로이 다닐 수 있는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비어스가 네오에게 “빨간약을 먹으면 당신이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가상현실에서 벗어나 진짜 삶을 살 수 있고, 파란약을 먹으면 아무런 고민 없이 가상현실에 남을 수 있다.”라고 했다. 지금의 나라면 네오처럼 빨간약을 선택할 수 있을까?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김경수

“나는 누구인가?” 라는 존재의 물음에 응답하려면 렌즈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그럼에도 나는 나의 아바타로로 내 자신을 대신한다. 오랜 시간 아바타에 숨어 지내면서 ‘나’를 문득 아바타로 인식하는 순간 ‘나’와 아바타는 뒤섞여 버렸다. 이제 아바타는 바로 가식이 없는 나 자신인 것이다. 사진의 자화상은 ‘나’라는 형상의 문제가 아니라 ‘나’라는 영혼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셔터가 열리고 얼마 간 빛의 연주가 끝나면 나의 이야기를 담은 형상은 바로 숨을 거두고, 카메라에 이미지로 남는다. 방금 빛으로 그려냈던 이야기들은 그저 지나간 기억처럼 해체되어 내 머릿속 복잡한 신경세포들 사이로 흩어져 간다. 그렇게 나의 형상들이 사라져 갈 때 나의 이야기는 한 장의 이미지로 남는다.

사진은 지금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남겨진 흔적이다. 나의 상상을 이미지로 재현하는 작업은 순간 그 시공 속에서 이미 죽어버린 나, 즉 현실 속에 흩어진 나의 파편들을 찾고자하는 노력이다.